'마음공부'에 해당되는 글 12건
- 2008.05.14 기독교 신자의 불교 읽기.. 3
- 2008.05.13 프랭클린 플래너 (Franklin Planner) 정말 필요한 것인가???
- 2008.05.06 이아무개(이현주) 목사님의 '길에서 주운 생각들'..
- 2008.04.08 기도의 응답? 유인력? 5
- 2008.04.04 병의 근원 (나의 위염 치료기)
- 2008.04.02 시크릿 (The Secret)
- 2008.03.14 풍요의 마인드..
- 2008.03.11 스티븐 코비의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
- 2008.02.27 인간관계
- 2008.02.25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시작점은 나.. 2
나는 기독교를 종교로 갖고 있다. 어려서 부터 교회를 다녔고 이른바 모태신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그렇게 독실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독실하냐 그렇지 못하냐의 기준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교회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술,담배의 문제라던지 제사의 문제, 타 종교와의 관계, 예배의 의미, 예배 참석 빈도 등에서 일반적인 독실한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내가 어디가서든지 누구앞에서든지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성경 말씀을 믿고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교회를 정말 열심히 다니고, 문자 그대로의 성경 말씀을 따르고 타 종교와의 관계에서 기독교의 우월함을 믿고(?) 있었을 당시에는 나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담대하지 못했다. 그 당시의 나의 신념은 내가 정립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신앙은 그 수준이 어떻든 간에 내가 체험하여 얻은 내 참 신앙이기 때문에 나는 떳떳하다.
지금의 이런 신앙을 세우게 된 데에는 불자들의 글에서 얻은 바가 크다. 내가 무슨 철학자도 종교학자도 아니므로 불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불교 경전을 깊게 읽은 것도 아니다. 단지 스님들이 쓴 수필들을 통해서 그 분들이 어떤 신앙생활(그게 불교 신앙일지라도)을 하는 지를 보고 내 기독교 신앙 생활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교회에 다니면서 왜 하필 스님들의 글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물론 나도 처음 내 신앙을 고민하면서 기독교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읽은 기독교 서적은 대부분 저자들의 간증을 담은 내용이 많았다. (내가 많은 서적을 접하지 않았으므로 선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서적에서 기도의 응답과 그로 부터 얻은 기적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부터 얻을 수 있는것은 그 저자들 만큼 뜨겁게 기도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자책과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기적들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러던 중,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게 되었다. 아마도 내 나이 또래에 수능을 준비한 사람들은 한번쯤은 지문으로라도 접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왠일인지 나이가 들어 읽은 '무소유'는 전혀 다른 느낌을 전해 주었다. 스님의 집에 도둑이 들어 집기를 훔쳐간 일을 다룬 내용이었다. 대체 어떤 반응이 나올까 했는데, 스님의 반응은 이렇다. 도둑이 와서 가져갈 만한 것을 갖고 있는 스님 자신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를 굉장히 고민했다. 도대체 불교가 무엇이길래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가 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의문으로, 여러 불교 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스님들의 소소한 일상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또 스님들의 수필외에도 불교 입문서등을 접하면서 얕게 나마 불교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기독교 서적보다는 스님들의 글이, 참된 신앙생활과 그 생활을 찾기 위한 자기 반성을 가능케 했다. 이 때 부터, 내 자신이 누구 인지 내 인생은 무엇인지 내 신앙은 어떤 것인지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 뇌리에 꽂힌 옛 선승의 한마디가 있었다.
" 달을 보여달라고 해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 보는구나"
정확한 인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위와 같은 내용이었다. 이 한마디에 나는 정말 뭐랄까 한 방 맞은 느낌이랄까? 그리고는 마지막 카운터 펀치는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헉! 이게 말이 되는 말인가?
위의 두 말을 통해서 내 신앙의 기준을 찾게 되었다면 좀 너무한가? 아무튼 나는 그랬다.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했고, 다른 사람의 신앙 기준이 아닌 내 신앙 기준을 내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다른 신앙 서적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세운 기준 때문에 죄책감을 갖지도 않게 되었다.
또 너무 과도한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루터가 카톨릭의 전통으로 부터 벗어났을 때의 기분이 이렇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 본다. 아무튼 방법이 어쨌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이라면 괜찮은 길이 아닐까 싶다.
프랭클린 플래너 (Franklin Planner) 정말 필요한 것인가???

매년 연말과 연초에 다이어리를 사려는 고민을 하게된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해 한해 지나가는 것이 정말 짧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한 해를 알차게 살고 싶게 되고, 그러자면 계획을 세워야 하고, 따라서 계획을 정리할 또는 기록할 다이어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고민을 3년 전 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점점 늙어가고 있다는...) 오랜 시간의 웹서핑 끝에 프랭클린 플래너 라는 것을 사면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버릴것 같았다. 세계적으로 많은 유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데다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인 코비 박사가 만든(?) 것이고 추천에 추천을 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난 새로운 인간으로 바뀔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가격. 정말 3개월을 고민했다. 다이어리 하나에 7~8만원이라.. 속지만 3만원.. 난 CEO버젼을 구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왠만한 다이어리.. 한 만원이면 사는데.. 흠.. 코비 박사가 말하길 프랭클린 플래너는 다이어리가 아니라 플래너라고 했다. 그냥 기록 도구가 아니라는거지.. 게다가 이 플래너는 기존의 다이어리와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신세대 인간관리 도구란다.. 결국 괜히 3개월 시간낭비만 하다가 구입결정..
이제 3년의 세월이 지났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구입 상태 그대로의 수많은 속지들 뿐이다. 흠냐.. 결국 나는 3년 동안 계속 활용은 못하면서 버리지도 못하는 플래너를 위해 속지를 매년 구입했고. 활용도는 제로에 가까웠다. 문제는 무엇일까? 나는 플래너 자체의 활용도 보다는 플래너를 사용한 사람들의 생활 성공 사례 들에 너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코비 박사의 생활 개선 방법이나 프랭클린 플래너를 활용하여 생활 개선을 도와주는 방법 등은 아주 이상적이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플래너는 단지 도움을 주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플래너가 정말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라 프랭클린 플래너의 형식이나 구조가 현재의 내 생활을 개선하는데 적합하냐 안하냐의 문제이다. 나의 경우 아직 대학원생이고 생활의 대부분이 정해진 스케쥴과 일정한도의 사람들과의 약속정도이다. 반면 위클리 컴파스는 한 주의 계획을 세울 수 있어서 좋았지만 하루 하루의 일정을 세분할 만큼의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주에 위클리 컴파스 외에 하루의 일정난은 정말 1%수준의 기록만이 남게 된다. 얼마나 종이 낭비인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프랭클린 플래너 소용없습니다' 가 아니라 프랭클린 플래너가 주고자 하는 도움은 굉장히 좋지만 그게 자신의 현재 생활에 적합한가는 충분히 따져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코비 박사의 의도는 그냥 5천원짜리 수첩에서도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꼭 프랭클린 플래너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3만원에 육박하는 속지 가격.. 한 웅큼의 종이라고 하기엔 분명 너무 비싼 가격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구입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굳이 정확한 판단없이 구입하긴 아깝지 않은가?
이것 참.. 3년 동안 버린 돈이 아까워서.. 급한 마음에.. 슥슥 적어봅니다.. T.T
그 때 이런 저런 고민들을 참 많이 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는 그 하나님인건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왜 그렇게 다른지.. 성경이라는 것이 정말 예수님의 가르침을 100% 전달하고 있는지.. 혹 내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존재인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 이런 저런 유혹(?)에 빠져 참 믿음을 구하기 위해서, 또 내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 이곳 저곳 이책 저책을 기웃거렸다. 그 때 JMS에 가서 교육도 받았고, 절에도 가보고, 기공수련같은 것도 해보고, 도를 아십니까를 쫓아도 가보고 했다. 정답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주심을 알게 되었다.
그 때 만난 여러 책 중 하나가 바로 이현주님의 길에서 주운 생각들이다. 나에게는 참 많은 힘이 되었다.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으러 다니면서,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참 많이 들었다. 내가 교회에서 배운 말씀들과는 너무 다른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거 목사님이었던 분이 걸어오신 길을 읽어보니, 그분은 교회의 뜻이 아닌 성경의 뜻을 따라 움직이셨던 것이다. 기독교에서 정해놓은 틀이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믿음을 지켰는데, 그것이 목사님의 직분을 놓게까지 만들어 놓았던 거다.
책에서는 과거 목사님이셨던 분이 성경을 포함한 여러 경전들로 그 분 생활에서 느끼고 깨닫게 된 내용들을 짧고 쉬운 글로 전달하고 있다. 짧고 쉬운 글이라고는 하지만 깊은 사색이 담겨 있기 때문에 수필 형식으로 3~4페이지에 거친 단문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많은 고민을 하게 한다. 또 많은 시험에 빠지게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다고 한다. 또 다른 성인의 가르침과도 통한다고도 한다. 교회에서는 배우지 않은 방향이다. 책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단지 그분이 해온 고민들과 사색들을 읽다보면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단지 나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고민을 정리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더라.. 책이 답을 주진 못하지만 책을 잘 따라가다보면 그리고 혼자 고민하고 사색하다 보면 좋은 길이 보이게 되더라..
기도의 응답을 받은 적이 있는가?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아마도 기도의 응답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역시 내 신앙을 유지하는 힘은 내가 받은 기도의 응답이다. 정말 열심히 믿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극적이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일반 신자들이 경험하는 신앙의 체험은 기도의 응답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기도가 응답되었는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우리 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다. 정말 기도를 하면 이루어지는지. 그냥 운으로 된거 아닌지.. 만약 응답이 된다면 시험 100점 맞게 열심히 기도하면 정말 그렇게 되는것인지.. 아이들은 이런것들이 굉장히 궁금하다. 하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어른들도 궁금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어른들이 궁금해 하지 않거나 궁금한 것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모범답안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에서 기도의 응답이 되고 안되고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한 기도는 들어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응답이 없다. 시험 100점 맞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게 바로 기도의 응답에 대한 모범답안인 것이다.
이제 기도의 응답이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의 판단 기준이 마련되었다. 그럼 이제 핵심 질문. 기도의 응답이 어떻게 오느냐에 관한 문제가 남아 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예를 살펴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우선, 성경의 인물들을 살펴보자. 유명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다. 십계명을 돌에 새겨 주셨고, 이집트에 10가지 형벌을 내리셨다. 예수님께 간구한 사람들은 죽었다가도 살아났다. 가장 극적인 형태의 응답이다.
그럼 요즘 시대의 간증에는 어떤 예가 있을까? 어떤 사람은 꿈에서 하나님이 길을 보여 주셨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성경책을 막 읽다가 딱 어느 한 구절에서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고 한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정말 기도했던 대로 이루어져서 없던 돈이 막 생기고, 구원의 손길이 온다고도 한다. 아마 이런 부분이 요즘 신앙을 갖기 어려운 원인이 아닐까 싶다. 분명 성경에서는 아주 극적인 기적이 일어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지금 최고의 목사님들도 교황도 그 어느 누구도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한다. 대 재앙도 없다. 사람들은 기도의 응답이 직접적이지 않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면, 정말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걸까? 그냥 우연히 잘 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크릿에 사람들은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시크릿에서 말하는 유인력은 기독교의 기도와 많이 닮았다. 정말 원하는 것을 그리는 것이고 이미 성취했다고 믿는 것은 성경의 구절과 같다. (이미 저자가 언급했듯이..) 저자는 그렇게 열심히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이유를 나름의 논리로 설명한다. 그 논리는 동양의 철학과 닿아서 온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바탕을 깔고 있다. 유일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도가 그 기도를 들어주는 누군가의 의지로 성취된다기 보다는, 긍정적인 마인드와 강한 열망이 복을 이끌어 온다는 동양 전통적인 철학에 더욱 공감한다.
그래서 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혹시 내가 받은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유인력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정답이 있을까? 성경에서는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자신의 신앙 생활에 구속되지 말고, 신앙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도 위염을 비롯한 병의 발생원인과 치료방법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적잖이 놀랐기 때문이다.
난 지금으로 부터 약 7년 전 심각한 위염상태였다. 너무 위가 아프고 쓰려서 참을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문제는 아프고 나서 병원에 찾아가면, 의사들의 진단이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이었다. 내시경을 해봐도 위벽이 아주 깨끗하단다. 하지만 아픈 상태에서 병원에 가면 위벽이 헐어서 그런거라며 통증을 멈추는 약을 처방해준다. 거의 한달에 2~3번 심각한 위염이 발생하고 그때마다 통증을 사라지게 하는 약을 먹으며 3년 가까이를 보냈다. 그러다가 정말 이건 아니다 싶어 종합병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놈의 위염을 완전히 치료 받고 말겠다는 결심을 해버린거다.
그.런.데 나름 유명하다는 종합병원의 진단 결과는
의사 : "위가 아주 깨끗하시네요 별 문제 없는데요" 뭐 이런거다.
나 : "그런데 왜 자꾸 아프죠?"
의사 : "글쎄요.. 신경성입니다. 식사 너무 맵고 짜게 하지 마시구요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이게 공통적인 반응이다.
결국 그냥 신경성이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결론에 허망하게 (사실은 그당시 화가 많이 났었다. 국내에서 알아준다는 병원의 진단이 겨우 이정도라는 사실에 좀 어이없었으므로..) 집에 돌아왔다.
그러던 중, 마음 공부에 심취해 있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얘기를 하던중 우연찮게 말다툼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이녀석이 내 마음 상태를 꼬집기 시작하더니 이런말을 던지는 것이다
친구 : " 니가 그러니깐 맨날 그렇게 위가 아픈거야 "
나 : " 어? 너 내가 위 아픈거 어떻게 알았냐? "
친구 : " 니 마음이 그러니깐 그런거라니깐"
헉스.. 그친구는 제대하자마자 바로 1년이상 외국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위염이 있었는 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내 위가 아픈 것을 알아차린 것에 정말 까무러치게 놀랐다. 그 친구의 말로는 내 마음에 응어리가 있고 그것을 풀지 못하고 항상 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 안좋은 반응을 하는거란다.
내가 마음의 안정을 찾고, 마음 속에 매여 있는 화를 풀어내면 위도 좋아질 것이라는 거다. 갑자기 하던 말다툼을 멈추고 내 마음속의 얘기를 꺼냈다. 나는 이런 저런 고민이 있고, 나는 이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나는 남이 잘되는 것을 못보고, 자꾸 시샘이나고, 미래가 너무 걱정이되고.. 등등..
그런 마음을 놓아버리면, 내 위가 편해질것이라는 말에, 그 친구의 추천을 받아 마음 공부를 시작했다. 일단 그 친구의 말을 믿고, 또 마음 공부를 하면서 얻은 지식들로 부터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음을 고쳐먹었다. 위가 아플때마다 '아~ 아직도 내가 무언가에 쫓기며 사는구나, 아직도 내려놓지 못했구나' 하는 자각을 하며 내가 움켜 잡으려 하는 것들을 내려 놓았다. 그러자 위염은 사라지고 보다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의사들이 진단한 신경성 위염이라는 말이 맞긴 하다. 하지만 의사들이 말하는 신경성은 양의에서는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로 밖에는 안들린다. 내 마음이 병의 원인이라는 진단은 병원이 아닌 마음공부를 통해 얻게 되었고, 그 원인을 확신하게 된 이후로는 매우 쉽게 병을 고치게 되었다.
이렇게 고치는데 3년 정도 걸린것 같다. 스티븐 코비의 책에는 '풍요의 마인드'라고 하는 개념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넘치고 넘치므로,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얻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마인드이다. 빈곤의 마인드는 그 반대로, 남이 잘되는 것은 나에게는 불행이 될것이라는 제로섬개념이다. 코비는 책에서 빈곤의 마인드는 마음의 병을 만들고 곧 육체의 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아주 잘 정리된 표현으로 내 마음공부의 결과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거다..
나의 투병(?)기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혹 아직도 마음의 병으로 몸이 아픈 사람이 있다면 어서 깨닫고 치유되길 바란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내가 갖는 마음이 온 우주와 통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마음 속으로 그리는 것들이 온 우주와 통하여 결국 생각한대로 마음에 그린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인력' 또는 '끌어다기는 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을 과거와 현재의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고, 그 사람들은 자신의 원하는 것을 강하게 끌어 당길 수 있었다는 사례뜰을 다루고 있다.
관심이 있었던 부분은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다. 꾸준한 기도나 강한 기도는 그만큼 온 우주에서 기운을 끌어당겨 자신의 기도가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성경의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즘 이 책이나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읽으면서, 서양이나 동양의 철학 또는 마음공부가 결국에는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두 책에서 설명하는 내용들, 특히 시크릿에 나온 내용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떠나서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라고 하는 철학이 서양에서도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 참 재미있다. 예전에 요가가 단지 몸의 스트레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듣고 적잖이 놀란적이 있었다. 요가는 일단 마음공부를 위해서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수단에 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가의 궁극은 차크라를 열어 우주와 하나가 되기 위한 것이란다. (혹 부정확하다면 고쳐주시기를... 들은 얘기라 확신하지는 못함) 이렇게 보면 시크릿의 저자가 찾아낸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뭐 내가 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또 지식이 그만큼 되는 것도 아니지만 혼자서라도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요즘의 책읽기가 참 재미있다^^
바로 풍요의 마인드라는 거다 (분명 읽을땐, 열심히 읽었는데 정확한 용어인지는 잘 기억이..^^;) 이에 반대되는 마인드는 빈곤의 마인드가 있다. 빈곤의 마인드는 쉽게 얘기해서 모든 것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 외의 누군가가 무엇을 얻게 되면, 그 만큼 내 몫은 줄어든다는 식의 마인드를 의미한다. 이런 마인드를 갖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성공이 나의 패배로 여겨지기 때문에, 상대방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없다는 거다. 이거야 말로 내가 계속 해오고 있던 잘못아닌가! 나는 친구나 동료들의 성공을 축하해 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뭔가 꺼림찍했었던 것이다. 나는 더 넓은 마음을 가져보려고 노력했지만, 점점 더 벤뎅이가 되어갔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풍요의 마인드는 빈곤의 마인드와는 달리,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만큼 충분하다는 식의 마음가짐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성공이나 행복이 나의 패배나 불행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거다. 정말 그렇다. 물론 특정 상황에서는 나의 패배가 상대의 성공으로, 또는 그 반대로 이어지는 제로섬게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인간 관계에서는 이 풍요의 마인드가 나를 더 자유롭게 해줄 것 같다.
앞으로 시도해 봐야지!! ^^
내가 이렇게 놀라게 된 데는 서양철학 또는 종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언급은 좀 조심스럽지만(이건 뭐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 다른 생각을 가졌더라도 소수의 의견이라고 이해해주시길..),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에 의해 가리워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인 참 진리가 '기독교' 또는 '천주교'라고 하는 틀에 갇혀 버린것 같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중심 뜻을 이해하기 보다는, 말 자체를 놓고 해석하기에 급급한 종교서적을 너무도 많이 봐온 터다. 그래서 나도 교회를 다니고 있는 기독교 신자이면서,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 서적을 점점 멀리하고 어느새 스님이 쓴 수필이나 불교 서적을 읽게 되었다.
갑자기 종교 예기가 나와 버렸지만, 이러한 배경에서는 나는 서양의 철학(?)에 대해 안좋은(?)감정을 같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읽게 된 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다. 놀랍게도 스티븐 코비는, 언급된 내용을 조목 조목 분석하는 서양의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그 내면을 깊게 들여다 보고 진단하는 동양의 철학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오랜 동안 기독교 바탕에서 자라면서, 기독교 서적을 읽으면서 그 한계를 느끼게 된것과 마찬가지로, 불교 서적을 읽으면서도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불교서적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는 다는 점이다. 기독교 서적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는 등등 너무 정답을 얘기하고 있는 반면, 불교서적은 '이러 이러 했더니 저러저러 하더라, 아~ 사람 마음은 이렇구나', '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마음가짐을 깨닫게 되었다' 는 식의 얘기를 하는것이다. 스티븐 코비는 이 두가지 방식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듯 하다.
책을 읽으며 드는 감상을 좀 적어보려 했는데 말이 너무 길어진 것 같다. 지금 인간 관계의 한계를 느끼고 있고, 내 자신을 오랜만에 돌아보고 있는 시점에서, 너무 좋은 책을 읽게 된 것 같아 좋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책을 읽다 보면 문득 문득 드는 생각들이 많은데, 앞으로는 그때 그때 마다 감상들을 기록해 놓고 싶다.
인간 관계라는게 참 어렵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역시나 문제의 시작은 나로부터다. 상대방의 행동이나 태도가 내 맘에 들지 않았고, 그에 따라 그 상대방을 대하는 내 태도도 당연히 곱지 않다. 그럼 악순환이 생겨서 상대방의 행동도 계속 악화되고, 나 역시 계속 강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상대방의 태도를 그냥 좋게 받아 들이면 될까?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거다.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게 되고, 지적할 수 없는 경우에는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 화가 치밀고, 악감정이 생겨난다.
갈 수록 인간관계에서 한계를 느낀다. 특히나 후배와의 관계가 더욱 그렇다. 가치관의 변화가 어린나이에서 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 같다. 그 친구들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다. 해결책을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
'누가 나를 향해 벽을 쌓으면 반은 내책임~~'
흠..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정말 언제적 노래냔 말이다..-.-a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어린나이에도 이 가사의 깊이를 이해했던것 같다. 노래를 들으며, 나랑 문제가 있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며, 정말 그런지 따져보았으니 말이다. 지금에 와서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갖게 되는 여러 문제들은 남이 나에게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못을 해서거나 아니면 쌍방과실이다. 아무도 모르는 누군가가 아무 이유없이 나를 싫어 한다해도 결국 반은 내 책임인거다. ( 나에 대해 잘 모르는 그 사람은 나의 외모를 보고 나를 판단했을 것이고, 내 외모를 잘 가꾸지 못한 내 책임이 있을 테니까.. 그게 내가 개선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는 나중얘기가 되겠지만.. )
요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읽으며,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가는 중이다. 책에서는,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은 나 자신을 찾는 데서 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인간관계의 단편적인 기술들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내 마음이 드러나게 될 수 밖에 없다. 맞는 말이다. 나는 인간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책을 구해온 것 같다. 가능한 화를 안내기, 좋은 점을 찾아 말하기, 말수를 줄이기, 그냥 못본체 하기, 그냥 웃어주기 등등...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내면의 나 자신이 드러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꼬집게 되고, 안좋은 점을 지적하게 되고, 짜증을 내게 되고, 괜히 사람이 싫어지고.. 이런 나 자신이 나타난다. 책에서 언급한 상황과 똑같다.
이제야 습관3의 시작부분을 읽고 있으니, 아직은 먼 얘기가 되겠지만 언젠가는 변화된 내 자신을 확인하고 싶다. 나 스스로를 알아가고, 그래서 내 나름의 인생 기준을 갖고,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내 자신의 삶을 사는 내가 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