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기독교 신자의 불교 읽기..

black rabbit 2008. 5. 14. 16:11

   나는 기독교를 종교로 갖고 있다. 어려서 부터 교회를 다녔고 이른바 모태신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그렇게 독실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독실하냐 그렇지 못하냐의 기준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교회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술,담배의 문제라던지 제사의 문제, 타 종교와의 관계, 예배의 의미, 예배 참석 빈도 등에서 일반적인 독실한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내가 어디가서든지 누구앞에서든지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성경 말씀을 믿고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교회를 정말 열심히 다니고, 문자 그대로의 성경 말씀을 따르고 타 종교와의 관계에서 기독교의 우월함을 믿고(?) 있었을 당시에는 나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담대하지 못했다. 그 당시의 나의 신념은 내가 정립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신앙은 그 수준이 어떻든 간에 내가 체험하여 얻은 내 참 신앙이기 때문에 나는 떳떳하다.
   지금의 이런 신앙을 세우게 된 데에는 불자들의 글에서 얻은 바가 크다. 내가 무슨 철학자도 종교학자도 아니므로 불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불교 경전을 깊게 읽은 것도 아니다. 단지 스님들이 쓴 수필들을 통해서 그 분들이 어떤 신앙생활(그게 불교 신앙일지라도)을 하는 지를 보고 내 기독교 신앙 생활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교회에 다니면서 왜 하필 스님들의 글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물론 나도 처음 내 신앙을 고민하면서 기독교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읽은 기독교 서적은 대부분 저자들의 간증을 담은 내용이 많았다. (내가 많은 서적을 접하지 않았으므로 선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서적에서 기도의 응답과 그로 부터 얻은 기적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부터 얻을 수 있는것은 그 저자들 만큼 뜨겁게 기도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자책과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기적들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러던 중,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게 되었다. 아마도 내 나이 또래에 수능을 준비한 사람들은 한번쯤은 지문으로라도 접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왠일인지 나이가 들어 읽은 '무소유'는 전혀 다른 느낌을 전해 주었다. 스님의 집에 도둑이 들어 집기를 훔쳐간 일을 다룬 내용이었다. 대체 어떤 반응이 나올까 했는데, 스님의 반응은 이렇다. 도둑이 와서 가져갈 만한 것을 갖고 있는 스님 자신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를 굉장히 고민했다. 도대체 불교가 무엇이길래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가 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의문으로, 여러 불교 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스님들의 소소한 일상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또 스님들의 수필외에도 불교 입문서등을 접하면서 얕게 나마 불교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기독교 서적보다는 스님들의 글이, 참된 신앙생활과 그 생활을 찾기 위한 자기 반성을 가능케 했다. 이 때 부터, 내 자신이 누구 인지 내 인생은 무엇인지 내 신앙은 어떤 것인지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 뇌리에 꽂힌 옛 선승의 한마디가 있었다.
 
  " 달을 보여달라고 해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 보는구나"

  정확한 인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위와 같은 내용이었다. 이 한마디에 나는 정말 뭐랄까 한 방 맞은 느낌이랄까? 그리고는 마지막 카운터 펀치는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헉! 이게 말이 되는 말인가?

 위의 두 말을 통해서 내 신앙의 기준을 찾게 되었다면 좀 너무한가? 아무튼 나는 그랬다.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했고, 다른 사람의 신앙 기준이 아닌 내 신앙 기준을 내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다른 신앙 서적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세운 기준 때문에 죄책감을 갖지도 않게 되었다.

  또 너무 과도한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루터가 카톨릭의 전통으로 부터 벗어났을 때의 기분이 이렇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 본다. 아무튼 방법이 어쨌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이라면 괜찮은 길이 아닐까 싶다.